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심 가문 (문단 편집) === 아랍 반란과 현대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은 중동 지역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열강으로, 중동에 관련된 3개의 협상을 진행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부진해지자 영국은 당시 [[메카]] 샤리프였던 후세인에게 접근하였고, 아랍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다면 전후 그 대가로 통일 아랍 국가를 세워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것을 '[[후세인 맥마흔 서한]](McMahon–Hussein Correspondence)'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편으로 [[프랑스 제3공화국]]과 전후 아랍 지역을 둘이 잘 나누어 갖자는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을 체결했다. 즉 영국은 후세인과의 협상을 진행할 때 실제로 그에게 아랍 지역을 맡길 생각이 없었다. 또한 영국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전후 중동 지역에 유대인의 나라를 세워 주겠다는 '[[밸푸어 선언]]'까지 발표했다. 어쨌든 후세인은 영국에 동조하여 연합군 편에 서서 오스만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고 [[헤자즈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전후 약속된 아랍 국가 건설은 빈말이 되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레반트]] 지역을 차지해버렸다. 하심 가문 측에서는 [[시리아 아랍 왕국]]을 세우고 후세인의 삼남인 [[파이살 1세]]를 국왕으로 추대했지만, 그저 [[미승인국가]]로 남았고, 건국 4개월 만에 프랑스에 항복하여 없어졌다. 중동 전역에 걸친 통일 아랍 국가의 꿈이 깨지고, 요르단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영국의 영향 아래 각각 후세인의 차남인 압둘라는 [[트란스요르단]]의, 삼남이자 이전 시리아 국왕이었던 파이살 1세는 [[이라크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파일:Arabia_1905-1923.png]]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칼리파]]제를 폐지하자 메카에 머물던 수호자 후세인은 자기를 칼리파라고 선언했으나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반대파들의 공격을 받아 망명해야 했다. 이후 장남 알리가 헤자즈 국왕 자리를 이어받았지만, 혼란을 이용해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의 네지드 술탄국이 쳐들어와 알리를 쫓아냈다. 쫓겨난 알리는 동생 파이살이 있던 이라크로 탈출했고, 헤자즈 왕국을 합병한 네지드 왕국은 이후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석권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 [[나세르]]의 [[아랍 연합 공화국]] 구상에 자극을 받아, 1958년 한때 [[요르단]]과 이라크의 하심 왕국들끼리 '[[아랍 연방]]'이라는 연합을 구성하기로 하고, 이라크의 [[파이살 2세]]를 연방의 원수로 추대하기로 했다. 그러나 반년 만에 이라크에서 압둘카림 카심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국왕 파이살 2세를 포함한 파이살 1세의 후손들을 학살해버렸고, 이라크로 망명했던 후세인의 장남 알리의 아들 압둘일라(عبد الإله, 'Abd al-Ilah)[* 파이살 2세가 미성년자였을 때 섭정을 맡았다.]도 살해하였다. 후세인의 4남인 제이드는 당시 영국 주재 이라크 대사로 런던에 나가 있어서 화를 면하였고 현재 이라크 하심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